북 이 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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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 이 넬(Uí Néill)은 중세 아일랜드 문헌에 등장하는 북서부 얼스터 지역을 침략한 나일 노이기알라흐의 후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아일레흐 왕국을 세우고,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으로 분파되어 아일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케넬 코나일은 도네갈 주를 기반으로, 케넬 네오간은 이니쇼웬 반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상위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다. 8세기부터 아일랜드 초기 역사학자들은 위 네일의 정치적, 종교적 우위를 강화하기 위해 가계도와 역사 기록을 재구성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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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이 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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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명칭 | |
일반 명칭 | 북부 오닐 |
아일랜드어 명칭 | In Fochla (인 포흘라) In Tuaiscert (인 투아이스크르트) Ailech (알레흐) |
역사 | |
시작 | 425년 이전 |
종료 | 1197년 |
이전 국가 | 아일랜드 영지 |
후속 국가 | 해당 사항 없음 |
주요 사건 | 해당 사항 없음 |
통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국왕 | 에오간 막 네일 (초대) Flaithbheartach Ua Maol Doraidh (플라흐베르타흐 우아 마올 도라이흐) (마지막) |
언어 | |
공용어 | 아일랜드어 |
현재 국가 | |
현재 소속 국가 | 영국 아일랜드 공화국 |
수도 | |
수도 | 다수 |
기타 | |
각주 | 해당 사항 없음 |
2. 기원과 신화
중세 아일랜드 문헌에 따르면, 425년경 나일 노이기알라흐의 아들들(에오간, 코날 굴반, 엔다)과 다른 이들이 북서부 얼스터를 침략하여 기존 울라드의 영토를 줄이고 아일레흐 왕국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북부 위 네일 왕조의 기원으로 설명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나일의 아들들은 정복한 땅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는 후일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과 같은 주요 씨족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기록은 당시의 명확한 증거 부족으로 인해 그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후대에 위 네일 가문의 정치적 우위와 아르마 교회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8세기 이후, 초기 아일랜드 역사가들이 가계도, 왕 목록 등을 당시의 정치적 필요에 맞게 수정하거나 조작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3세기경에는 케넬 코나일이 자신들의 기원을 설명하는 독자적인 역사 서술을 발전시켰는데, '코날 굴반의 또 다른 세계 모험'(Eachtra Conaill Gulbain|아흐트라 코날 굴반ga)과 같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들은 위 네일의 영웅적인 정복 과정을 묘사하며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최근에는 모계 조상, 지명, 고고학 연구 및 DNA 분석 등을 통해 북부 위 네일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일부 연구는 이들이 크루이틴과 같은 다른 집단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DNA 분석 결과 역시 전통적으로 알려진 나일 노이기알라흐가 아닌 다른 공통 조상의 존재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북부 위 네일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한 이해가 복잡하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2. 1.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
중세 아일랜드 문헌에 따르면 425년경, 나일 노이기알라흐의 세 아들인 에오간, 코날 굴반, 엔다는 콜라 우아이스의 아들 에르크 및 그의 손자들과 함께 북서부 얼스터를 침략했다고 전해진다. 이 침략으로 기존 울라드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고, 나일의 아들들이 차지한 땅에는 아일레흐 왕국이 세워졌다.이 땅은 세 형제에게 나뉘었는데, 코날 굴반(Conall Gulban)은 서쪽 지역을 차지하여 '티르 코나일'(Tír Chonaill, 오늘날의 도네갈 주)이라 이름 붙였고, 이는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 씨족의 기원이 되었다. 에오간(Eógan)은 주요 반도를 차지하여 '이니스 에오겐'(Inis Eógain, 오늘날의 이니쇼웬 반도)이라 불렀으며, 이는 케넬 네오간(Cénel nEógain) 씨족의 시작이 되었다. 엔다는 아일레흐 남쪽 땅을 명목상 소유했으며, 이 지역은 '마그 엔다'(Mag nÉnda)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기록이 부족하여 이러한 침략이 실제로 있었는지, 침략자들이 정말 위 네일(Uí Néill) 가문에 속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은 전통 기록에 등장하는 나일의 아들들을 통틀어 북부 위 네일(Northern Uí Néill)이라고 부른다.
특히 8세기경, 케넬 네오간 출신의 타라의 왕이었던 아에드 알란과 아르마 대주교 콩구스 등의 후원을 받아, 초기 아일랜드 역사가들이 위 네일 왕조의 정치적 우위와 아르마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각색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과정에서 가계도, 왕 목록, 역사 기록 등이 당시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수정되거나 조작되었을 수 있다.
이 시기 약 12개의 씨족 집단이 '북부 위 네일'로 분류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13세기에 이르러 케넬 코나일은 도네갈 주에 해당하는 북부 위 네일의 원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자신들의 기원과 정당성을 강조하는 역사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인 '코날 굴반의 또 다른 세계 모험'(Eachtra Conaill Gulbain|아흐트라 코날 굴반ga)은 나일 노이기알라흐의 아들들이 코노트에서 출발하여 울라드 북서부 영토를 침략하고, 토착민인 달 피아타흐로부터 땅을 빼앗아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 왕조를 세우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 영토는 대략 오늘날 아일랜드 공화국의 도네갈 주에 해당한다.
하지만 모계 조상, 지명, 성인전, 고고학적 증거 등을 분석한 결과, 케넬 코나일의 기원에 대한 다른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들이 실제로는 크루이틴(Cruthin)의 한 분파이며, 이브의 위 에카크 코바(Uí Echach Cobo)나 코나일레 무이르테임네(Conaille Muirtheimne)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의 진정한 기원에 대한 혼란은 최근 DNA 분석 결과로 더욱 복잡해졌다. 이 분석에 따르면 두 씨족의 후손들은 약 1,730년 전 아일랜드 북서부에 살았던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사학자 브라이언 레이시(Brian Lacey)는 이 공통 조상이 나일 노이기알라흐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며, 달 피아타흐의 지도자였던 카나 마크 루이그데흐 람파타(Cana mac Luigdech Lámfhata), 콜라 우아이스의 아버지인 에쿠 도임렌(Echu Doimlén),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크루이틴 왕자 등을 가능한 후보로 제시했다.
2. 2. 역사적 검토
중세 아일랜드 문헌 기록에 따르면, 425년경 나일 노이기알라흐의 세 아들(에오간, 코날 굴반, 엔다)과 콜라 우아이스의 후손들이 북서부 얼스터를 침략하여 울라드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아일레흐 왕국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은 코날 굴반이 서쪽의 티르 코나일, 에오간이 이니스호윈 반도, 엔다가 아일레흐 남쪽의 '마그 엔다'를 차지했다고 설명한다.그러나 당시의 구체적인 증거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침략의 실제 발생 여부나 침략자들이 정말로 위 네일에 속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전통적인 기록의 신뢰성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은 니얼 노이기알라흐의 아들들로 알려진 이들을 일반적으로 북부 위 네일(Northern Uí Néill)로 통칭하며 아일랜드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8세기경, 특히 케넬 네오간 출신의 타라의 왕이었던 아에드 알란과 아르마 대주교 콩구스의 후원 아래, 초기 아일랜드 역사학자들이 위 네일의 정치적 우위와 아르마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 기록을 구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상황을 기록이 부족한 5세기까지 소급 적용하여, 가계도, 왕 목록, 역사서, 초기 연대기 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재작성하거나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시기에 약 12개의 집단이 '북부 위 네일'로 분류되었으며, 그중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이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케넬 코나일은 도네갈 주 지역에서 지배력을 확립하고, 이전의 역사 기록 수정 내용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코날 굴반의 또 다른 세계 모험'(Eachtra Conaill Gulbainga)이라는 이야기는 니얼 노이기얼러크의 아들들이 코노트에서 출발하여 울라드 북서부, 즉 오늘날의 도네갈 주에 해당하는 영토를 토착민인 달 피아타흐로부터 정복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한편, 모계 조상, 지명, 성인전, 고고학적 증거, 성인 가계도 등을 분석한 결과, 북부 위 네일의 한 축인 케넬 코나일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들이 실제로는 크루이틴의 한 분파이며, 이브의 위 에카크 코바 및 코나일레 무이르테임네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최근의 DNA 분석 결과로 더욱 복잡해졌다. 두 집단의 후손들에 대한 DNA 분석 결과, 약 1,730년 전 아일랜드 북서부에 공통 조상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역사학자 브라이언 레이시(Brian Lacey)는 이 공통 조상이 전통적으로 알려진 니얼 노이기얼러크일 가능성은 낮다고 보며, 대신 달 피아타흐의 지도자였던 카나 마크 루이그데흐 람파타(Cana mac Luigdech Lámfhata), 콜라 우아스의 아버지인 에쿠 도임렌(Echu Doimlén), 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크루이틴 왕자 등을 가능한 후보로 제시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북부 위 네일의 기원과 초기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에 중요한 의문을 던지며, 보다 복합적인 역사적 맥락을 시사한다.
3. 역사
북 이 넬(위 네일) 상위 왕국은 초기에 '북쪽'을 의미하는 In Fochla|인 포클라sga로 알려졌으며, 상왕은 '북쪽의 왕'을 뜻하는 rí ind Fhochlai|리 인드 포클라이sga로 불렸다. 이 왕국은 여러 하위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하위 왕국은 더 작은 투아타들을 지배했다.
주요 하위 왕국으로는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이 있었다. 케넬 코나일의 영토는 '코날의 땅'이라는 의미의 Tír Conaill|티르 코나일sga이라 불렸는데, 이 영토는 16세기 말까지 케넬 코나일이 소유했으며, 오늘날 도네갈 주의 기반이 되었다. 케넬 네오간의 영토는 '에오간의 섬'을 의미하는 Inis Eógain|이니시 오겐sga으로 불렸고, 이 이름은 현재 이니쇼웬 반도 지명으로 남아있다. 케넬 네오간의 왕은 '아일레흐 왕'을 뜻하는 rí Ailig|리 알리그sga로 칭해졌으며, 그들의 중심지는 이니쇼웬 반도 입구에 위치한 그리아난 오브 아일레흐였다.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은 주변의 여러 투아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에는 케넬 코나일이 북 이 넬 내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케넬 네오간과의 경쟁 속에서 점차 주도권을 케넬 네오간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러한 세력 변화는 북 이 넬의 역사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3. 1. 케넬 코나일의 초기 지배
원래 북 이 넬의 지배적인 분파는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이었으며, 이러한 우위는 6세기부터 8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Cenél nEógain)은 상위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734년, 케넬 네오간의 왕 아에드 알란(Áed Allán)이 도전해오자, 당시 북 이 넬의 상왕이자 케넬 코나일 출신이었던 플라이흐베르타흐 막 로잉세흐(Flaithbertach mac Loingsech)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케넬 코나일의 지배력은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케넬 코나일 출신 통치자들은 다시는 북 이 넬 전체의 상왕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타라의 왕위는 케넬 네오간과 남 이 넬(Southern Uí Néill)의 클란 콜마인(Clann Cholmáin)이 번갈아 차지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케넬 코나일의 세력은 780년대에 이르러 크게 약화되었고, 이는 케넬 네오간이 세력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울스터 연대기(Annals of Ulster)에 따르면, 788년 케넬 네오간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6세기에 케넬 코나일이 세운 데리의 수도원을 불태웠다. 이듬해인 789년에는 북 이 넬의 패권을 두고 아에드 오르드니데(Áed Oirdnide)가 이끄는 케넬 네오간과 케넬 코나일 사이에 클로이테흐 전투(Battle of Cloítech)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케넬 네오간이 승리하면서 케넬 코나일은 상왕위는 물론, 이니쇼웬 남쪽의 비옥한 평야인 마그 니타(Mag nÍtha) 지역에 대한 통제권마저 상실했다. 이 전투 이후 북 이 넬 상위 왕국은 '알레흐'(Ailech)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케넬 코나일은 이후 티르 코나일(Tír Conaill) 지역의 하위 왕국으로 그 세력이 축소되었다.
3. 2. 케넬 네오간의 부상
북부 위 네일 내에서는 본래 케넬 코나일이 지배적인 분파였으며, 6세기부터 8세기 말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은 북부 위 네일 상위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경쟁했다.734년, 케넬 네오간의 왕 아에드 알란의 도전을 받은 후, 당시 북부 위 네일의 상왕이자 전체 위 네일의 상왕이었던 케넬 코나일 출신의 플라이흐베르타흐 막 로잉세흐가 퇴위했다. 이를 계기로 케넬 코나일의 지배력은 약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케넬 코나일 출신 통치자는 다시는 위 네일 전체의 상왕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 시점부터 타라의 왕위는 케넬 네오간과 남부 위 네일의 클란 콜마인 사이에서 교대로 차지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780년대에 이르러 케넬 코나일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자, 케넬 네오간은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울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788년 케넬 네오간은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6세기에 케넬 코나일이 세운 데리의 수도원을 불태웠다. 이듬해인 789년, 북부 위 네일의 패권을 둘러싸고 아에드 오르드니데가 이끄는 케넬 네오간과 케넬 코나일 사이에 클로이테흐 전투(Battle of Cloítech)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케넬 네오간이 승리함에 따라, 케넬 코나일은 북부 위 네일의 상왕위 경쟁에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이니쇼웬의 그리아난 오브 아일레크 남쪽에 있는 비옥한 평야 마그 니타(Mag nÍtha)에 대한 지배권도 상실했다. 클로이테흐 전투 이후, 북부 위 네일 왕국은 기존의 명칭인 '인 포클라(In Fochla)' 또는 '인 투아이스케르트(In Tuaiscert)' 대신 케넬 네오간의 중심지 이름을 딴 '아일레흐(Ailech)'로 불리게 되었다. 케넬 코나일은 이 패배 이후 티르 코나일(Tír Conaill) 지역의 하위 왕국으로 세력이 축소되었다.
3. 3. 아르기알라 정복
북 이 넬(Northern Uí Néill)은 초기에 아르기알라, 울라드와 같은 강력한 얼스터 왕국들이나 소규모의 키나흐트(Cianacht) 같은 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주저했지만, 여러 세기에 걸쳐 얼스터의 대부분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한 세기에 약 16.09km 미만의 속도로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이 과정에서 주요 수혜자는 케넬 네오간이었으며, 이들은 중앙 얼스터의 아르기알라 왕국과 동쪽의 울라드를 희생시키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서쪽의 케넬 코나일로부터 압박을 받으면서, 케넬 네오간은 이니쇼웬 반도의 근거지에서 출발하여 포일 강을 건너 현재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 주와 타이론 주 지역으로 진출했다. 타이론 주의 이름은 케넬 네오간에서 유래했는데, ''티르 네오겐(Tír nEógain)''은 "에오간(Eógan)의 땅"을 의미한다.
아르기알라는 아홉 개의 하위 왕국으로 이루어진 연합체였으며, 그 이름은 '인질 제공자'를 의미하여 종속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위 네일 왕조의 시조로 여겨지는 나일 노이갈라흐, 즉 '아홉 인질의 나일'이라는 별명 역시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본래 울라드의 지배하에 있던 아르기알라는 827년, 나일 카일(아에드 오르드니데의 아들) 왕이 레스 캄(Leth Cam) 전투에서 아르기알라와 울라드의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북 이 넬의 패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10세기 동안 케넬 네오간의 분파인 케넬 빈니그(Cenél mBinnig)는 아르기알라 왕들의 전통적인 즉위 장소였던 툴리호그 요새 주변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11세기에 이르러 케넬 네오간은 툴리호그 요새(Tulach Óc)를 완전히 장악하고, 기존의 왕실 소재지였던 아일레크(Ailech)에서 이곳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이는 툴리호그 요새의 상징적 중요성을 활용하고 경쟁 왕조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툴리호그에서 즉위한 첫 케넬 네오간 왕은 아에드 우아 네일(Áed Ua Néill)이었다. 왕실 소재지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레크는 이후 오랫동안 케넬 네오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케넬 네오간의 확장으로 인해 아르기알라의 권력 중심지는 점차 얼스터 남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케넬 네오간의 구체적인 정복 활동은 다음과 같다.
분파 | 주도 가문 | 정복 지역 및 내용 |
---|---|---|
케넬 페라다이그(Cenél Feradaig) | 맥 카흐마일(맥콜) | 서부 아르기알라의 수도 클로거 점령 |
케넬 노엥구사(Cenél nÓengussa) | 맥 카나(맥캔) | 북부 아마 주 지역 진출 |
오케인 | (해당 없음) | 키아나흐타(Ciannachta)의 영토인 키너트 정복 |
오닐(Ua Neill) | (해당 없음) | 네이 호 서쪽 아르기알라의 우이 투르트레 영토 차지, 툴리호그 요새 근거지 마련 |
우이 피아크라흐 아르다 스트라흐(Uí Fiachrach Arda Strath) | 우아 크리차인(Ua Crícháin) (아르기알라 왕조) | 아일레크의 지배하에 편입. 12세기까지 현대 페르마나 주의 피르 루이르그(Fir Luírg)로 남하 확장. |
또한 케넬 네오간은 남쪽으로 진출하여 현대 슬라이고 주 지역에 카이르프레 드로마 클리압(Cairpre Dromma Cliab)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에도 불구하고 케넬 네오간은 일부 영토를 상실하기도 했다. 티르 코나일에서 세력을 키운 오도허티(Ua Dochartaig)는 결국 케넬 네오간을 이니쇼웬 반도에서 몰아냈고, 오도넬(Ua Domnaill)은 케넬 모아인(Cenél Moain) 계열의 케넬 네오간 가문인 우아 가름레다이그(거믈리)를 마그 니타(Mag nÍtha)에서 축출했다. 피르 루이르그와 투아하 라하(Tuatha Ratha)는 결국 피르 마나흐(Fir Manach)의 매과이어(Mag Uidhir) 영주권 아래로 들어갔다. 카이르프레 드로마 클리압 역시 브레이프네(Bréifne)의 티게르난 우아 루아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케넬 네오간이 아르기알라 영토로 확장하면서, 아일랜드 전체에 대한 수위권을 주장하던 아르마(Armagh) 교회는 점차 케넬 네오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르마는 자체적인 교황권 우위를 내세우는 선전 활동을 지속하며 케넬 네오간의 정치적 주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3. 4. 바이킹과의 관계
9세기 동안 아일레흐 해안과 얼스터의 나머지 지역은 바이킹의 습격을 받았다. 850년대에 이르러 바이킹 세력이 분열되자 얼스터의 왕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반격에 나섰고, 바이킹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이는 866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당시 아일레흐의 왕이었던 아드 핀들리아흐는 "케넬 네오간과 달 나라디 북쪽" 지역에 있던 바이킹의 거점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으며, 로흐 포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중요한 승리였는데, 이후 수년 동안 바이킹은 얼스터 지역을 거의 침범하지 못했으며,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에 비해 얼스터에는 바이킹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실제로 12세기 후반 노르만족이 얼스터에 도착했을 때, 바이킹이 남긴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정착지는 '울프레크의 여울'(오늘날의 라른)뿐이었다.
3. 5. 그리애넌 오브 아일레흐
케넬 네오겐(Cenél nEógain)의 왕은 '알레흐 왕'(rí Ailigsga)으로 불렸으며, 그들의 초기 근거지는 이니쇼웬 반도 입구에 위치한 그리애넌 오브 아일레흐(Grianan of Aileach)였다. 789년 클로이테흐(Cloítech) 전투에서 아에드 오르드니데(Áed Oirdnide)가 이끄는 케넬 네오겐이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을 상대로 승리한 이후, 북 이 넬 상위 왕국은 이전의 '인 포클라'나 '인 투아이스케르트' 대신 "알레흐"(Ailech)로 알려지게 되었다.일부 연구자들은 케넬 네오겐이 원래 케넬 코나일 영토 내에 있었을 수 있는 그리애넌 요새 부지를 점령하고, 상위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고향 영토 이름을 따서 '그리애넌 오브 아일레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애넌 오브 아일레흐는 일반적으로 6세기부터 케넬 네오겐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101년, 먼스터의 왕 무이르체르타흐 우아 브리안(Muirchertach Ua Briain)에 의해 파괴되면서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4. 주요 분파
중세 아일랜드 문헌에 따르면, 북부 위 네일(Uí Néill)은 나일 노이기알라흐(Niall Noígíallach)의 세 아들인 에오간(Eógan), 코날 굴반(Conall Gulban), 엔다(Enda)가 5세기경 북서부 얼스터(Ulster)를 침략하여 세운 아일레흐 왕국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통적인 기록은 당시 증거 부족으로 그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들을 통칭하여 북부 위 네일(Uí Néill in Tuaiscirt|위 넬 인 투아스키르트ga)이라고 부른다.
북부 위 네일에는 약 12개의 씨족(Cenél)이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가장 지배적인 세력은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 코날 굴반의 후손)과 케넬 네오간(Cenél nEógain, 에오간의 후손)이었다. 이 두 분파는 오랫동안 북부 위 네일의 주도권을 다투며 아일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8세기경, 케넬 네오간 출신의 타라의 왕 아에드 알란(Áed Allán)과 아르마 주교 콩구스(Congus)의 후원 아래, 초기 아일랜드 역사가들이 위 네일 왕조와 아르마 교회의 정치적, 종교적 우위를 강화하기 위해 가계도, 왕 목록 등 역사 기록을 의도적으로 재구성하고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당시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사를 소급 적용하려 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북부 위 네일, 특히 케넬 코나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모계 조상, 지명, 성인전, 고고학적 증거 등을 토대로 크루이틴(Cruthin)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등 다른 학설도 존재한다. 최근의 DNA 분석 결과는 케넬 코나일과 케넬 네오간의 후손들이 약 1,730년 전 아일랜드 북서부에 공통 조상을 두었음을 보여주지만, 이 조상이 반드시 나일 노이기알라흐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4. 1. 케넬 코나일 (Cenél Conaill)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영어)은 나일 노이기알라흐(Niall Noígíallach)의 아들 중 한 명인 코날 굴반(Conall Gulban)의 후손들이 세운 아일랜드의 왕조이자 영토이다. 중세 아일랜드 문헌에 따르면, 코날 굴반과 그의 형제들은 5세기경 북서부 얼스터를 침략하여 울라드(Ulaid)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아일레흐 왕국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코날 굴반은 서쪽 지역을 차지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 "티르 코나일"(Tír Chonaill, 코날의 땅)이라 명명했다. 티르 코나일은 오늘날 아일랜드 공화국의 도네갈 주에 거의 해당한다.케넬 코나일은 케넬 노간(Cenél nEógain, 코날 굴반의 형제 에오간의 후손)과 함께 북부 위 네일(Northern Uí Néill)을 구성하는 가장 강력한 두 분파였다. 8세기 이후, 위 네일 왕조와 아르마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초기 아일랜드 역사가들이 과거 기록을 재구성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 기록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케넬 코나일은 13세기까지 도네갈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과 역사를 설명하는 문헌인 ''Eachtra Conaill Gulbain''(코날 굴반의 모험)을 후원하기도 했다.
케넬 코나일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루이틴(Cruthin)과의 연관성 등 다른 학설도 제기되었으며, 최근 DNA 분석 결과는 케넬 코나일과 케넬 노간이 약 1,730년 전 공통 조상을 가졌음을 시사하지만, 이 조상이 반드시 나일 노이기알라흐는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케넬 코나일에서 분화된 주요 씨족으로는 오도넬(O'Donnell), 오도허티(O'Doherty), 오보일(O'Boyle), 오갤러허(O'Gallagher) 등이 있다. 이들 중 오도넬 가문은 후대에 케넬 코나일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케넬 코나일의 가장 유명한 후손 중 한 명은 데리에 수도원을 세운 성 콜룸바(St. Columba)이다.
4. 1. 1. 케넬 코나일 가계도
다음은 아홉 명의 인질의 닐에서 유래된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의 가계도에 대한 설명으로, 아일랜드의 역사 시대가 시작된 8세기까지 구전 역사의 인물을 포함한다.케넬 코나일은 닐 노이기알라흐(Niall Noígíallach)의 아들인 코날 굴반(Conall Gulban)의 후손들이다. 닐 노이기알라흐의 다른 아들로는 에오간 막 네일(Eógan mac Néill, 케넬 노간(Cenél nEógain)의 시조)과 엔다(Enda, 케넬 넨다(Cenél nEnda)의 시조) 등이 있다.
코날 굴반의 후손은 다음과 같이 분화되었다.
- 퍼거스 켄포타(Fergus Cennfota)
- 도이(Doi): 케넬 두어흐(Cenél nDuach)의 시조.
- 엔나 보게인(Enna Bogaine): 케넬 보기너(Cenél mBogaine)의 시조. 이 가문에서는 세크나사흐(Sechnasach, Rí Cenél mBogaine), 둔갈(Dúngal, 672년 사망, Rí Cenél mBogaine), 포르바사흐(Forbasach, Rí Cenél mBogaine) 등이 배출되었다.
퍼거스 켄포타의 후손 중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세트나 막 퍼거소(Setna mac Ferguso): 그의 아들 아인미르 막 세트나이(Ainmuire mac Sétnai, 569년 사망)와 손자 아드 막 아인무이레흐(Áed mac Ainmuirech, 598년 사망)는 모두 아일랜드의 고위 왕이었다.
- 아드 막 아인무이레흐의 아들 도날 막 아에도(Domnall mac Áedo, 642년 사망) 역시 고위 왕이었다.
- 도날의 아들 오앵거스 막 도날(Óengus mac Domnaill, 650년 사망)의 아들 로잉세흐 막 오앵거소(Loingsech mac Óengusso, 703년 사망)는 고위 왕이었다.
- 로잉세흐의 아들 플라이트베르타흐 막 로잉시그(Flaithbertach mac Loingsig, 734년 폐위)는 마지막 케넬 코나일 출신 고위 왕이었으며, 그의 후손은 카난난 가문(Ua Canannain)으로 이어졌다.
- 플라이트베르타흐의 형제 아드 문데르그(Áed Muinderg, 747년 사망, Rí in Tuisceart)의 후손은 마엘 도라이드 가문(Ua Maildoraid)으로 이어졌다.
- 도날의 다른 아들 퍼거스 파나드(Fergus Fanát, 654년 사망)의 아들 콩갈 켄 마가르(Congal Cennmagar, 710년 사망)도 고위 왕이었다. 그의 후손은 O'Breslin-Fanat 가문으로 이어졌다.
- 아드 막 아인무이레흐의 다른 아들 마엘 코보 막 아에도(Máel Cobo mac Áedo, 615년 사망) 역시 고위 왕이었다.
- 마엘 코보의 아들 켈라흐 막 마엘 코보(Cellach mac Máele Cobo)와 코날 카엘(Conall Cóel)은 공동으로 고위 왕에 올랐으며(658년 또는 664년 사망), 이들의 후손은 갤러거 가문(Clann Ua Gallchobair)을 형성했다.
- 페딜미드 막 퍼거소(Fedlimid mac Ferguso): 그의 아들은 이오나 수도원을 창설한 유명한 성직자 콜룸바 킬레(Columba Cille, 성 콜룸바)이다.
그 외 케넬 코나일에서 분화된 주요 씨족으로는 O'Freel, 도허티 가문(Clann Ua Dochartaig), 보일 가문(Clann Ua Baighill), 오도넬 가문(Clann Ua Domnaill) 등이 있으며, 특히 오도넬 가문은 13세기 이후 케넬 코나일의 주도권을 잡았다.
4. 2. 케넬 네오간 (Cenél nEógain)
케넬 네오간(Cenél nEógain)은 니얼 노이기얼러크의 아들들로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북부 위 네일의 주요 분파 중 하나이다. 케넬 코나일(Cenél Conaill)과 함께 북부 위 네일에서 가장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했다.8세기경, 케넬 네오간 출신의 타라의 왕 아에드 알란과 아르마 주교 콩구스의 후원 아래, 초기 아일랜드 역사학자들은 위 네일 왕조와 아르마 교회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 가계도, 왕 목록 등을 포함한 역사 기록을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 기록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케넬 네오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다. 최근의 DNA 분석 결과는 케넬 네오간과 케넬 코나일의 후손들이 약 1,730년 전 아일랜드 북서부에 공통 조상을 두었음을 시사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니얼 노이기얼러크를 의미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케넬 네오간의 주요 씨족으로는 오닐 가문과 맥러플린 가문이 있었다. 두 가문은 오랫동안 케넬 네오간 내에서 주도권을 다투었으나, 1241년 오닐 가문이 맥러플린 가문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면서 케넬 네오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4. 2. 1. 케넬 네오간 가계도
다음은 역사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계보의 인물인 페르갈 막 마엘 두인으로부터 시작하는 세넬 너건의 계보를 보여주는 차트이다.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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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놀리, S.J., 편집. (2007). 《아일랜드 역사 옥스포드 동반자》.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23483-7.
- 코스그로브, 아트, 편집. (2008). 《아일랜드의 새로운 역사, 2권: 중세 아일랜드 1169-1534》.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9539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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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피, 숀 (2014). 《브라이언 보루와 클론타르프 전투》. Gill & Macmillan. ISBN 978-0-7171-6207-9.
- 레이시, 브라이언 (2003). 《아일레크의 그리안 - 식별에 대한 참고사항》.
- 레이시, 브라이언 (2006). 《Cenel Conaill과 도네갈 왕국, 서기 500-800》. Dublin: Four Courts Press. ISBN 978-1-85182-9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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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리슨, 패트릭 (2017년 6월 16일). “Luigne Breg와 Uí Néill의 기원”. 《왕립 아일랜드 학술원 회보: 고고학, 문화, 역사, 문학》 117C: 65–99. doi:10.3318/priac.2017.117.04.
참조
[1]
웹인용
Life of St. Columba
https://books.google[...]
Penguin UK
2015-04-26
[2]
서적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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